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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골단이란 무엇인가

뉴스홍이 2025. 1. 11. 21:48

백골단이란?


이름 백골단 白骨團 | Paekkoltan

정식 명칭 사복중대, 사복기동대

관련도서 <실록 백골단> - 유인철 저. 영재출판사. 1991. 백골단 1기였던 저자가 자신의 경험담을 토대로 저술한 수기이다.


백골단(白骨團)은 청카바(청자켓)와 청바지, 흰색 하이바를 착용하고 시위대를 진압하던 전의경, 직원 기동대원을 통틀어서 일컫는 별칭이다.

80, 90년대에 방석복을 입고 열을 맞추어 진압하는 일반적인 전의경들과는 다르게 가벼운 복장으로 시위대에게 달려들어 대오를 헤집고 검거하던 것으로 악명 높았다.

이들은 일반 전의경, 사업장 구사대와 함께 권위의 상징이자 시민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사실 백골단이라는 말은 경찰측이 아닌 시위대측에서 만들어져서 대중에 퍼졌기 때문에 대중들이 가진 백골단의 이미지와 문서에서 주로 설명하는 사복체포조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 사복체포조가 백골단의 이미지에 가장 부합하지만 대중과 시위대가 알고 있는 백골단은 여러 시기의 여러 진압부대의 모습과 과장되거나 사실무근인 정보도 섞여 있기 때문에 사실과 다른 면도 있고 사람마다 백골단에 대해 기억하는 모습이 서로 다르기도 하다.

백골단의 명칭에 대해서는 후술하듯이 복장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제일 유명하지만 청와대 경비대인 백일단(101경비단)에서 왔다는 주장도 있다. 경찰 정예 부대라는 점에서 풍문상의 백골단과 현실의 백일단은 유사점이 있다. 80~90년대 만들어진 악명이 그대로 이어져 시위대에게 공포로 만들어졌을 가능성도 있다. 이 외에 이승만이 운영했던 자유당의 백색테러 정치깡패 집단에서 유래했다는 의견도 있다.

역사


일반적으로는 1985년 8월 1일 서울시장 명의로 모집된 사복체포조는 경찰들 중에서 대부분 무술 유단자 및 특전사와 해병대 수색대 출신들이 특채되어 주류를 이루었으며 시위자들을 진압하는 모습이 흰색 헬멧에 일반 전투경찰들과 구분되는 청색자켓 복장 때문에 백골단이란 별칭이 붙었다고 알려졌다.

남아있는 사진, 영상들이나 당시 전, 의경 출신들의 증언 등을 보면 실제로는 1985년 하반기쯤부터 전투경찰들이나 직업경찰관(일명 직원)들로 구성된 사복체포조 부대, 즉 사복중대들이 서울시경 산하에 창설되어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86년까지 서울기동대 산하에 전경사복중대, 직원사복중대들이 증설되고 전국적으로 형사기동대(일명 형기대)가 창설되면서 이들 역시 사복체포조 역할을 맡게 되었다. 서울을 제외한 지역의 전경사복중대들도 이 시기에 발족한 것으로 보인다.


형기대를 제외하고는 창설 초기인 1985년부터 1980년대 후반까지는 직원중대나 전경중대 모두 81, 87같이 80단위 중대가 사복중대였다.

80년대 후반에 91~98중대의 전경사복중대와 81~90중대의 직원사복중대로 개편되어 1992년경까지 운영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일반진압중대 내에서도 따로 한 개 소 혹은 분대 정도나 소대 내 고참급들이 청바지 청자켓 등 사복을 입고 사복체포조 역할을 하거나 일부 경찰서에서는 순수 의경들로 이루어진 경찰서 직속의 사복제대를 운영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방식으로 사복체포조가 운영되었다.


1991년 강경대 치사 사건이 일어나면서 사복중대는 여론의 질타를 받았고 1992년쯤에 서울 전경사복중대들은 모두 직원중대로 교체되어 1994년 말까지는 직원사복중대만 운영되었다. 단, 중대단위로 운용하지는 않았지만 사건 이후에도 몇몇 정복중대 내에서는 분대급 인원으로 사복조를 운용하기도 했다.

1994년 11월경 의경진압중대 중에서 각 기동대당 2, 3개 정도의 중대를 사복중대로 전환시켰다.

1994년에 전환된 사복중대는 처음에는 모두 "진사복중대"라고 하여 경우에 따라서 진압복과 사복 차림을 번갈아 입히며젼서 운영하다가 24, 37중대를 제외하고 모두 사복중대로 개편되었다.


연세대 사태 이후 1997년에는 무술 유단 경찰관으로 70, 71, 72, 73, 74중대를 신규 편성 및 기존 제1, 2, 3, 4기동대에서 의경 사복중대들을 차출해 특수기동대를 창설했고 2008년 촛불집회 등을 거치면서 현재의 경찰기동대가 운영되고 있다.

서울 외의 각 지역에도 사복중대들이 존재했다. 80년대부터 각 지역별로 직원중대인 형기대와 함께 전남의 1중대를 제외하면 경남 80중대, 부산 80중대, 경기 80중대 등 80단위 중대가 전경사복중대로 운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 중 전경사복중대들은 1991년을 전후로 하여 전경에서 의경으로 인원이 교체되고 서울 지역과 동일하게 92년 이후에 직원으로 교체되었다. 그 밖에 정복중대 속 사복조도 자주 운영되었고 전남의 2중대, 경기도의 3중대와 8중대, 부산의 5중대 등 90년대를 거치면서 많은 전의경 부대들이 사복중대로 창설 또는 해체되는 등의 과정을 겪었다.

각 지역 사복중대들 중에서도 전남 지역 사복중대들[14]이 전국적으로 유명했는데 당시 광주, 전남 지역의 시위가 격렬한 것으로 유명했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82, 83, 84중대와 3중대가 유명했다. 그 외에도 정복중대 내에서 사복을 입는 대원들도 많았고 방범순찰대 중에도 사복을 입고 진압하는 중대들도 있었다.

쇠퇴


백골단은 어느 특정한 시간에 해체돼서 소멸한 게 아니라 환경의 변화로 일반진압 중대와 외형적, 역할적 차이점이 사라지면서 서서히 없어졌다. 그렇기 때문에 사복중대가 따로 해체되거나 하지는 않고 일반 진압중대로 계속 남아있었다.

1996년 연세대 사태 이후 이듬해에 개선된 진남색에 어깨 보호대를 더한 방탄조끼 형상의 신형 방석복이 지급되기 시작하면서 정복중대와 사복중대 모두 이 신형 방석복을 착용하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X밴드 형태였던 구형 간이진압복을 착용하는 사복중대는 두껍고 무거운 구형 방석복(속칭 완진)으로 인해서 기동성이 부족한 정복중대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였는데 모두 보다 가벼워진 신형 방석복을 착용하게 되면서 사복중대의 의미가 다소 퇴색되었다.

시위환경이 변하면서 시위 진압 방식이 변하고 착용하는 방석복의 차이가 없어지면서 점차 정복중대는 예전보다 유연하고 가벼워지고 사복중대는 예전보다 무거워지는 식으로 변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1985년 창설부터 90년대까지 점진적으로 있어왔고 1999년 무최루탄 선언 이후에는 정복, 사복중대의 역할이 거의 비슷해졌다.

진압방식의 변화 외에도 외형의 차이도 사라졌다. 2000년경을 지나면서 기존의 사복중대들이 청자켓과 청바지를 입지 않게 되고 특유의 오토바이 헬멧도 검은색으로 칠해 버리면서 언뜻봐서는 일반적인 방석모랑 구별이 힘들어졌다. 아마 사복중대가 더 이상 백골단으로 불리지 않게 된 건 외형적 이유가 클 것이다.

사복중대가 그 특징을 잃으면서 백골단의 악명은 1기동대 1, 2, 3중대 즉, 단셋에게 넘어갔다.

2006년에 단셋이 해체된 뒤 2008년 촛불시위부터 경찰관기동대가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무도유단자를 중심으로 선발한 경찰공무원 1700여 명 규모로 창설, 감축 및 해체 수순을 밟아 가던 전의경 진압중대들을 대신해 시위 진압을 전담하게 되었다.


201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경찰관기동대의 진압능력은 의경중대보다 저조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실제로 2009년 촛불 1주기 시위 당시 경찰관 기동대가 투입되었는데 상부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바로 옆에서 전의경 대원들이 시위대에게 고립되어서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었음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뉴스를 찾아보면 전의경중대 중대장들이 직원중대 대원들에게 "좀 도와주라고요 좀!!!"이라며 간절하게 부탁하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전/의경 전역자들과 경비부서 경찰관들 사이에서 이러한 평가가 나온 데는 전의경 중대의 어마어마한 훈련량이 한 몫을 했다고 평가된다. 경찰공무원들을 실신할 때까지 혹독하게 훈련시킬 수는 없었다 보니 당시 경험치 면에서 의경 대원 쪽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이후 경찰관기동대를 정책적으로 1선에 우선 배치하면서 그 간극이 점점 줄어들었고 2020년대에 들어와선 경찰관기동대가 집회시위 관리업무를 거의 전담했다. 이후 의무경찰 제도가 폐지되어 현재와 같은 체제가 정착.

복장


백골단의 복장은 하얀색 또는 약간 누런색 오토바이 헬멧(백골단이란 별칭이 붙은 이유)과 청바지(화염병과 유리조각 등으로부터 보호 가능), 작은 방패, 단봉 그리고 운동화 복장으로 대표된다.

하지만 꼭 복장이 이렇게 일관되지는 않았다. 시기별로, 지역별로, 또 사복중대인지, 정복중대 내 사복조인지, 직원인지 대원인지에 따라서 유형은 많았다.

백골단의 상징적 복장은 청자켓과 청바지이지만, 초기에는 굳이 청자켓, 청바지가 아니라 각자 다른 여러가지 사복을 입는 경우도 많았다. 실제로 위의 4장의 사진을 합쳐놓은 사진을 보면 다양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이 보일 것이다. 그래도 청자켓과 청바지는 당시 패션유행상 흔하고 조달이 쉬우며, 튼튼한 데님 원단의 장점 등이 겹쳐 초창기부터 쓰여 왔다. 이런 일명 청카바는 보급으로 나오기도 하였지만 고참들이나 지방에 따라서는 그냥 추리닝 상의나 바람막이에 사제 청바지 같은 개인 복장을 입기도 했다.


흰색 헬멧 외에도 2가지 색으로 된 헬멧도 쓰였다. 색이 있는 헬멧은 초기에는 다양한 색상이 있었는데 그 중 은색과 파란색으로 된 것만 끝까지 쓰이게 된다. 헬멧의 모양새는 창설초기에는 챙이 달린 싸이카 헬멧이었지만 1989년경 챙이 제거되고 플라스틱 바이저가 달린 형태의 헬멧으로 교체되었다.

1996년 이후에는 지방청 차원에서 위의 플라스틱 바이저를 철망으로 교체하기도 했다.

시기에 따라서 헬멧에 페인트칠을 한다던가 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 때문에 녹색으로 칠했던 시기에는 녹골단으로 불리기도 했다.


흰색 헬멧도 주로  챙이 달린 싸이카 헬멧이었다. 하키 헬멧 같은 헬멧도 경기도를 중심으로 한 때 쓰였다. 

전남에서도 약간 누런 흰색 헬멧이 오랫동안 쓰였는데 특히 90년대 중후반에 이름을 날리던 82중대를 대표하는 헬멧으로 유명하다. 

자체적으로 다른 모델의 헬멧을 쓰거나 락카칠 등을 해서 꾸미거나 사제 오토바이 헬멧을 구해서 쓰기도 했고 위의 싸이카 헬멧과 모양은 비슷하지만 바이저 형태가 약간 다른 모습의 헬멧을 쓰기도 하는 등 중대, 지방별로 다양한 종류의 헬멧이 있었다.

1989년 이후에는 플라스틱 바이저가 달린 은색, 파란색 투톤 헬멧이 가장 보편적이었다.

서울 기준으로 청카바의 디자인은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중반 사이에 한 차례 변하였다.

전경중대들은 처음에는 어떤 부대는 첫 번째 사진 속 복장으로 통일되었는가 하면 또 어떤 부대는 앞에서 말했듯 제각기 다른 개인 사복이 많이 혼용되는 등 여러가지 모습이었는데 뒤로 가면서 일반적인 점퍼 형태의 청자켓 아니면 첫 번째 사진의 청자켓 차림으로 좁혀지고 마지막에는 대부분의 대원들이 두 번째 사진 속 청자켓으로 통일되었다. 다만 5000단위 부대나 정복중대 속 사복조 등은 다른 복장인 경우도 많았다.

분신정국 시기에는 사복중대에 대한 이미지가 극도로 나빠져서 청카바 대신 일반 기동복을 입고 다닌 적도 있었다. 

전경사복중대 해체 이후 직원사복중대들은 전경사복중대처럼 모든 중대가 청카바로 통일되지는 않았지만 각 중대원들끼리는 통일적이었던 것 같다. 주로 사파리 자켓이나 위의 두 번째 사진처럼 야전상의 형태에 색만 다른 상의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1994년 11월경 사복중대로 변경된 의경중대들은 위와 같은 야전상의 형태가 아닌 일반적인 형태의 청자켓을 착용했으며 자켓류 말고도 하늘색 계통 반팔과 긴팔 남방을 보급받아 여름철에 사용하였다. 또 이때의 특징이라면 청카바 외에 일명 흑카바라고 불리는 흑색 데님 소재의 옷이 지급되었다는 점이다. 1997년 이후 흑카바 옷의 모양새는 1989년~1992년에 쓰인 청자켓과 거의 같았고 청카바 폐지 이전까지는 사복중대들은 여름에는 청카바, 겨울에는 흑카바를 착용했다.

청카바는 2000년경부터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고, 그 빈자리는 흑카바가 대신했다. 흑카바는 몇 번의 변화를 거쳐서 2000년대까지 진사복 등으로 불리면서 사용되었지만 현재는 입지 않게 된 지 오래다. 이 속칭 흑카바는 기존 청카바와 달리 화염병을 대비하기 위해 불이 잘 붙지 않는 난연 소재로 제작되었다. 그래서 백골단이 아닌 일부 전경 격대에 존재했던 화염병 전담 중대들이 이 흑카바를 애용했다. 해당 중대의 경우, 시위 진압시 기동복을 입지 않고 이 흑카바를 착용했으며, 체포업무도 병행하기에 기동화를 신지않고 운동화를 착용했다. 이는 기존 백골단과 매우 유사하다.


지방중대도 창설 초기에는 사복을 입는 경우가 많았고 서울과 동일하게 90년대 들어 흑카바가 보급되어 사용되었던 것 같다. 또 앞서 말했듯이 2000년대 중반까지도 청카바를 입는 중대들이 존재했다.

무장은 초기에는 헬멧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거나 방탄조끼처럼 생긴 방석복 정도를 걸쳤다. 무릎 아래 정강이를 보호해주는 각반도 있었지만 초기에는 잘 쓰지 않다가 1988년경부터 많이 사용하게 되었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릎 부분도 따로 보호장비를 사용하기도 했다. 

1989~1990년경에는 새로운 형태의 진압복이 보급되었다. 일명 간이진압복, 간진. 기존에 사용하던 것과 달리 낭심과 어깨 부분에 보호대가 달리고 각반도 기존의 정강이만 덮는 형태에서 무릎과 발목까지 덮는 형태로 변화하였다.


처음에는 국방색 모델이 보급되다가 이후 회색으로 바뀌었다.

간이진압복은 1997년 진압복 개선 이전까지 전국의 사복중대에서 애용했다.

여담으로 간이진압복은 사복중대에만 보급되었지만 정복중대에도 나중에 보급되었다.[36] 하지만 대부분의 정복중대에서는 그 수가 적어서 주로 지휘관들이나 분대장, 전령 같은 몇몇 짬 되는 고참들이 차지했다. 간이진압복이란 이름처럼 비교적 가볍고 활동하기 편했는데 그것 때문에 당시 대나무가 들어간 두꺼운 진압복을 입어야 했던 일반 정복중대 대원들에게는 사복중대가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복장적 특징으로는 크로스 백처럼 생긴 방독면 가방이 있다. 일반적인 방독면 가방보다 더 단순하게 생겼는데 주로 서울, 경기도 지역에서 직원사복중대들이나 1985~1992년까지 있었던 전경사복중대들이 사용하였다. 타 지역이나 1994년 이후 의경사복중대들은 이 가방을 사용하지 않고 그냥 일반적인 방독면 가방을 매고 다녔다. 빨간색 가방이 해당 방독면 가방이다.


창설 초기에는 진압 시 단봉이나 맨손에 사과탄이라고 부르는 작은 최루탄을 주로 사용했다. 실제로 1986년, 1987년 영상 등을 보면 아무것도 없이 맨손으로 시위자들을 붙잡는 모습도 흔히 볼 수 있다. 당시에는 깨방, 사복방패등으로 불리는 거북이 모양 방패는 없었고 일부 대원들이 일반적인 진압방패를 지참하였다.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이후 사수대들이 조직화되고 쇠파이프등이 시위 현장에서 심심찮게 등장하자 경찰측에서는 기존의 사용하던 경찰봉을 대신하여 죽도를 사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이에 대응했다.

사복중대는 더 나아가 죽도에 철근을 박거나 아예 쇠파이프를 진압에 동원하기도 했으며 유명한 거북이 방패가 이 시기에 도입되었고 90년대 중반에는 근접분사기가 도입되었다.

1994년에 전환된 의경중대들도 기본적인 무장은 비슷했다. 진압복도 색만 다르고 동일했으며 진압방패나 거북이 방패, 봉, 근접분사기 등 장비도 유사했다. 다만 진압방패의 길이가 길어졌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전체적으로 후기로 가면서 무장이 더 충실해진다고 볼 수 있다.

활동과 만행


정복중대를 보조하여 기동력을 바탕으로 빠르게 시위대를 밀어버리거나 검거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일반 전경부대가 1선에 시위대와 대치하고 있다가 상황이 고조되면 명령에 의해서 양 옆쪽에서 백골단이 체포나 추격을 시도했고 이렇게 되면 시위대는 도망가거나 다시 뭉쳐서 공격대형을 이루었는데 백골단이 시위대 중 앞에서 지휘하던 주동자들을 뛰어가 붙잡고 무자비한 구타를 시도하니 다들 주춤거리게 되고 더 이상 다가서지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이렇게 되면 시위대들은 공포감에 몰입되어 패닉상태에 빠졌으며 특정 건물 등을 목표로 100m 간격을 두고 시위대를 붙잡고 밀어붙이는 무지막지한 진압을 시도하고 붙잡히면 반 죽음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하는 등 그야말로 공포의 부대였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간이 사다리 위에 올라간 기자를 날아차기해서 떨어뜨리거나, 집 안으로 도망간 학생을 문 부수고 들어가 머리잡고 끌고 나오기(남녀 가리지 않음), 출발하려는 지하철에 유리창을 깨고 난입해서 모조리 체포하기, 학교 안에 들어가서 도서관에서 멀쩡히 공부하고 있던 학생들을 머리 잡고 끌고 나오기 등등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폭력성을 보였다. 이러한 폭력은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에게도 무자비하게 행해졌기 때문에 1990년 KBS 사태 당시 백골단 300명이 여의도 본사로 투입돼 조합원들을 무자비하게 폭행해 117명을 연행한 바 있었다. 물론 군사정권 시기 정부와 언론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때로는 검거한 시위자들을 인근 경찰서로 연행하는 대신 멀리 떨어진 교외에 그대로 던져놓고 가거나 현장에서 잔인하게 구타하고 내버려 두기도 했다.


이들의 기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례로 상황시 방독면을 쓰고 서울역에서 명동까지 구보할 정도였다고 한다. 물론 허세가 조금 섞여 있기는 하겠지만, 목격담과 출신대원들의 고백도 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허황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최루탄이 기본적으로 사용되던 당시에는 진압에 참여하는 거의 모든 중대가 방독면을 쓰고 구보를 하며 훈련하였고 2000년대 초반까지도 수도권 진압 선봉중대, 지방 선봉중대들은 훈련명목 또는 체벌로써 정화통까지 끼운 상태에서 방독면 구보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물론 실신했다. 서울역에서 명동역까지는 거리는 네이버 지도 기준으로 2.4㎞ 정도라고 한다. 대략 도보 30분 정도 거리다. 그런데 1998년 만도기계(현 대유위니아) 파업 이후 시위 진압에서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게 됨에 따라 막바지 백골단들은 방독면 착용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백골단이라고 해서 무적은 아니었다. 특히 초창기로 갈수록 백골단의 무장은 가벼웠고, 그만큼 무장 시위대와 정면으로 붙으면 크게 다칠 수 있었다. 그래서 백골단이 활약하기 위해선 정복중대가 확실하게 뒤를 받혀줘야만 했다. 다만 후기로 가면서 사복중대의 무장도 꽤 튼실해졌다.


사실 정부의 지원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초창기 장비는 무전기 하나만 쥐어줬으며 한 번 출동을 나가면 3, 4일은 기본으로 길에서 노숙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노숙자라고 생각해 먹을 것도 줬다고. 장비도 부족하여 죽도,쇠파이프, 각목, 돌 같은 것을 스스로 구했다고 하나 실상은 시위현장에서 시위대가 버리고 간 것을 주워 썼다. 그러나 노태우 정부에서 문민정부로 바뀌면서 장비 보급이 제대로 이뤄지고 상기 서술한 무기들은 불법진압도구라고 하여 쓰지는 않게 되었다.

직원사복중대는 경찰들 중에서 지원자를 모집해서 구성되었는데 대부분 장신, 유단자 위주로 경쟁률이 높았고 군필자가 대다수였다. 특히 특전사와 해병대 수색대 출신들이 많이 특채됐으며 명령에 복종하는 군대식 특성을 가진 전의경 기동대와는 다르게 보다 자율성 있는 진압을 실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문민정부 시절엔 전의경 신병들을 체력 테스트해서 성적 좋은 대원들을 모두 사복중대로 보냈다고 하니 체력 하나는 끝내주는 셈이었다.

백골단은 내부적으로도 폭력 진압을 조장했으며, 대학이건 사업장이건 마구잡이 연행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었다. 이런 폭력적 강경 진압에 시위대도 가만있지 않고 대항하기 시작했는데 큰 역할을 하던 것은 녹두대나 오월대 같은 대항조직이다. 캠퍼스에서 사복경찰이 학내 지도부를 검거하던 1960~1970년대에도 자구적으로 형성되었던 사수대가 있었지만 1980~1990년 이후, 그리고 유신정권과 신군부와의 투쟁에서 더욱 규모가 커지게 되었다. 검거하려는 백골단과 시위자를 지키려는 사수대의 규모는 경쟁적으로 커졌다. 사수대가 하도 강력하게 저항하다 보니 백골단도 나중에 가면 생명을 걸어야 할 정도가 되었는데 사수대를 검거하려다 역으로 다구리에 두들겨맞고 부상당하거나 심하게는 살해되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했다.    

사건

백골단은 여러모로 악명을 떨쳤는데 시위진압 중 1991년 4월 당시 명지대생이었던 강경대를 이들이 진압 과정에서 철근이 든 죽도와 쇠파이프로 때려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악명을 떨쳤다. 당시 강경대는 시위대에서 사실상 낙오된 상황이었고 학교 담을 넘어 도주하던 중 백골단 5명에게 철근이 들어간 죽도와 쇠파이프로 두부를 구타당한 후 길거리에 버려졌으며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곧 사망하였다. 강경대를 살해한 백골단 대원들은 공판에서 반성은커녕 오히려 강경대에게 있지도 않은 화염병 혐의를 뒤집어씌웠고 이에 분노한 민가협 회원들이 공판을 아수라장으로 만들기까지 했다. 

강경대 사망 사건에 항의하는 시위 와중에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도 경찰에게 집단구타당해 사망했다. 그래서 성균관대 명륜캠퍼스엔 "김귀정 생활도서관"이라는 동아리가 지금까지 내려온다. 사후 김귀정의 유족이 백골단의 폭력진압으로 사망한 것으로 국가배상청구 소송을 걸었고 정부에서 거부했다가 대법원에서 공무원을 특정할 수 없더라도 국가배상을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95다23897)

1996년 3월 연세대 노수석도 일명 토끼몰이 진압 와중에 사망했다는 시위대 측의 주장이 있다.

백골단에 의해서 사람이 죽는 일도 존재했기 때문에 중경상을 입는 경우는 다반사였다. 1980~90년대에 전교조 주도의 소위 '참교육 운동'을 전후해 발생한 '고등학생운동(이하 고운)' 활동[49]을 했던 고등학교 시위대도 있었는데 백골단에 의해서 진압된 고등학생 시위자의 어지간한 뼈마디가 모두 골절된 경우도 있었다지만 언론에는 안 나왔다고 한다.


1991년 5월 7일에 백골단은 한진중공업 노조위원장 박창수의 빈소로 쳐들어가 영안실 벽을 깨부수고 박창수의 시신을 탈취하기도 했다.        

1991년에 안양병원 영안실로 난입한 백골단들. 이들은 영안실 벽을 뚫어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시신을 탈취해갔다.    

여담


1990년에 개봉된 박광수 감독, 심혜진, 박중훈, 문성근 주연의 영화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등장한다.

2014년 10월 10일 공개된 서태지 버전의 소격동 뮤직비디오에도 이 백골단이 등장했다.
영화 1987에서도 등장한다.

꼬마비 스토리, 안도 작화의 카카오웹툰 이염(移染)의 데님 자켓과 함께 주요 소재로 몇몇 등장인물들이 과거 백골단이었다.

홍콩 경무처의 기동대인 PTU에도 이들과 비슷한 역할을 수행하는 기동 체포조인 랩터 소대가 있다. 시위와 무관한 시민까지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등 사실상 21세기 백골단이다.

과거 백골부대, 즉 3사단 출신 장병들에게는 북한군과 함께 증오의 대상이었다. 부대의 명예인 백골의 이름을 더럽힌 겁쟁이 빨갱이 집단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오죽하면 만나면 죽여버리고 싶다는 말을 하는 이들도 있었을 정도. 백골(白骨)로 애칭이 겹치다 보니 발생하는 유무형의 피해가 꽤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출타 중 3사단 부대마크인 졸리 로저를 보고 백골단 아니냐며 해코지를 당해 국군 3사단 소속 군인이라고 해명하느라 진땀을 뺀 장병들도 있었다는 일화가 종종 떠돈다. 경찰 기동복이 군복과 비슷한 국방색이었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인 듯.

2025년 1월 9일 백골단을 자처하는 우파 청년단체가 김민전 의원의 주선으로 국회 소통관에서 기자회견을 열였다. 물론 이들은 경찰과 무관한 우파단체지만 백골단에 심한 트라우마를 가진 국민들의 역린을 건드렸기에 강한 비판을 받았다